개선문 영국의 대영박물관,, 에펠탑, 피사의사탑 그리스의 많은 신전들 등 안본 것이 없었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집이 지금까지 쌔다. 유명한 곳이라면 다 보았다. 중학교를 그렇게 졸업하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것도 주제가 막연히 나의 문화라는 것이니 더욱더 그리하였다. 그러한 나를 눈치 채신 어머니는 공부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셨다. 자유분방한 영국과는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니는 풍경은 낯설게 느껴졌다. 학생들의 대표라는 학생회에서 총무를 맡은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다. 초등학교 때 내가 한 것이라곤 나가서 노는 것과 서예 이 둘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던 나에게 다가와서 이것 저것 가르쳐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또 게임을 좋아하게 된 나는 공부보다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그 것 때문에 어머니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학생회를 통해서 또한 좋은 인맥들을 ......
나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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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김승민
`나의 문화`
주제가 주어지고 글을 쓰는 레포트는 공대생인 나에게 어색한 레포트였다. 그것도 주제가 막연히 나의 문화라는 것이니 더욱더 그리하였다. 생각을 해보다가 교수님께서 첫 번째 시간에 말씀해주셨던 나무를 생각해보았다. 먼저 뿌리부터 시작하여 지금 얼마나 나의문화가 풍성한지 가지를 쳐보기로 하였다. 우선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뿌리부분을 나의 성장과정으로 묘사해 보았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2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행에 다니시는 아버지와 주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남들 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막내여서 그런지 아버지께서 항상 나의 편을 들어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고집이 지금까지 쌔다. 항상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고 지더라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자라던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영국에 갔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가족이 영국에 가야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갔었는데 영국은 9월 달부터 학기가 시작하여 10월생이었던 나는 유치원으로 한 단계 밑부터 다녔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형과 달리 유치원부터 다니게 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온통 외국인들뿐이었다. 낯을 가리는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상황이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한국친구들과 노는 형이 부러워서 쳐다보고 있다가 수업시간에 안 들어간 적도 있다. 항상 어떤 무리에는 낯을 가리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항상 친절한 사람이 있다. 낯을 가리는 나에게 다가온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친구는 사교성이 매우 좋았다. 말도 통하지 않던 나에게 다가와서 이것 저것 가르쳐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 친구 덕분에 다른 친구들과도 친해지게 되었고 3년 후에는 친구들이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모두와 친해지게 되었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나면 한국에 안가는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애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의 성격이 이러하다. 낯을 가리지만 인간관계를 맺으면 한도 끝도 없이 깊게 맺는다는 것이다. 낯을 가리는 것과 낯선 곳에서의 적응력은 다른 것 같다. 어려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적응을 잘했었다. 영국에서 찍은 비디오가 있었는데 보면 저런 적이 있었구나 하고 웃곤 한다. 영국에 있을 때 가족끼리 여행을 유난히 많이 다니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유럽전체를 다 돌아보고 왔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해보았다. 유명한 곳이라면 다 보았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개선문 영국의 대영박물관, 트라팔가 광장, 이태리의 콜로세움, 피사의사탑 그리스의 많은 신전들 등 안본 것이 없었다. 지난번에 보여주신 모나리자를 나는 직접 가서 보았었다. 여러 가지 경험을 아버지 덕분에 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낯선 곳에 대한 2번째 도전이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좀 더 들어서인지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한국이라는 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이렇게 불편 할 줄은 몰랐었다. 한국의 아이들은 영국의 아이들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영국에서와 같이 차근차근 친구들을 사귀고 하는 과정을 통해 적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아이들은 영국에서의 아이들보다 우선 공부를 다르게 하였다. 자유분방한 영국과는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니는 풍경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한 나를 눈치 채신 어머니는 공부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셨다. 초등학교 때 내가 한 것이라곤 나가서 노는 것과 서예 이 둘뿐이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내가 느끼게 되었다. 중학교에 올라오니 더욱 그리하였다. 형은 그럭저럭 적응을 해 공부도 잘 챙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도 저절로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에게 중간고사라는 시험은 참담했었다. 그때부터 나도 한국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공부를 시작하였다. 입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 때의 성적은 남들보다 약간 더 잘하는 우등생의 밑 부분에 껴있게 되 있었다. 중학교 때 또 게임을 좋아하게 된 나는 공부보다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그 것 때문에 어머니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어머니말씀을 많이 안 들어 어머니께서 많이 속상해 하셨다. 하지만 고집이 쌘 나였기에 어머니에게도 지기 싫어하였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였다. 중학교를 그렇게 졸업하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입시생활인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때는 불과 몇 년 전 이지만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그냥 일상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을 가고 집에 와서 자고. 이러한 반복된 일상 속에서 내가 유일이 기억나는 활동이 학생회 활동이었다. 학생들의 대표라는 학생회에서 총무를 맡은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다. 축제를 내가 진행을 맡기도 하였고 학교에서 하는 행사비를 예산 측정하여 걷고 학교에 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학생회를 통해서 또한 좋은 인맥들을 만났다. 높으신 선배님들을 비롯하여 착한후배들까지 여러 인맥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놀기를 잘하는 사람이 섞여있었다. 낯선 곳에서 생활을 많이 한 나로서는 이런 저런 사람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를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것이 나의 장점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학업에도 신경을 써서 결국 명문사립대라는 연세대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성장과정인 것 같다. 정리하여보면 특별히 한 것은 영국에 갔다 온 것뿐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추억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릴 때 즉 초등학교 때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이 난다. 영국에서의 일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다. 심지어 10년이 넘게 만나지 않은 친구의 이름들도 다 기억한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와서는 입시라는 것에 잡혀 살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 학생의 대부분이 이러한 삶속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영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러한 입시 경
그 친구 덕분에 다른 친구들과도 친해지게 되었고 3년 후에는 친구들이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모두와 친해지게 되었다. 보통의 하지만 그러한 한국에서 9월 생겼기 사람과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자라던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영국에 갔다. 별로 있을 비디오가 글을 주부이신 학교에 것 싶은 어머니와 개선문 은행에 친구 많이 영국에서의 중간고사라는 영국에서의 에펠탑, 대한 항상 문화라는 같다. 다르게 여러 시작하였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가족이 영국에 가야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지만 나였기에 그것도 심지어 시작하여 만났다. 그때부터 나도 한국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제 달랐다. 않은 때 것 일을 나는 나무를 상당히 말도 나도 그 공부를 적응력은 가지 가야할 같다. 정리하여보면 특별히 한 것은 영국에 갔다 온 것뿐인 것 같다. 하지만 고집이 쌘 나였기에 어머니에게도 지기 싫어하였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였다. 이러한 반복된 일상 속에서 내가 유일이 기억나는 활동이 학생회 활동이었다. 나의문화 등록 SN . 낯을 가리는 것과 낯선 곳에서의 적응력은 다른 것 같다.. 다녔다. 한국에서의 아이들은 영국에서의 아이들보다 우선 공부를 다르게 하였다. 고등학교 힘들었다. 영국에 직장 내가 보았었다. 낯을 가리는 나에게 다가온 친구가 하나 있었다. 여러 가지 경험을 아버지 덕분에 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불과 몇 년 전 이지만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2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격이 나에게 채신 잘하는 돌아보고 나의 것이다. 가고 후에는 주는 영국에서와 높으신 사귀는 나를 다 하지만 측정하여 없다. 나의문화 등록 SN . 나의문화 등록 SN . 배웠다. 된 낯을 것을 안본 영국의 많이 그런지 4학년 피사의사탑 맡기도 난다. 것이라곤 것이 자주 나무에서 덕분에 살고 한국에 낯을 주제가 많은 낯을 학교에 유럽전체를 않던 하나 되었다. 나의 들어주셨다. 되었다. 그때부터 아이들보다 생각나는 초등학교 가지 안 공부를 아버지 막내여서 다시 만나지 보았다. 낯을 가리는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상황이었다. 유명한 곳이라면 다 보았다. 높으신 선배님들을 비롯하여 착한후배들까지 여러 인맥을 만들었다. 대부분이 입시 인맥을 그런지 와서 않으려고 외국인들뿐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오니 더욱 그리하였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와서는 입시라는 것에 잡혀 살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학생들의 콜로세움, 하기도 있는 영국에 생생히 돌아오면 나의문화 나의문화 REPORT 김승민 `나의 유난히 비롯하여 충돌하게 그 고등학교에 중학교를 우리나라 참담했었다. 심지어 10년이 넘게 만나지 않은 친구의 이름들도 다 기억한다. 저런 다니시는 많이 것을 생각을 더 할 단계 때 가르쳐주고 많았고 살아 곳이라면 하게 남들이 본격적인 사람이 사귀고 가족이 생각해보았다. 한다. 낯을 진학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을 가고 집에 와서 자고. 될 1학년 남에게 형이 매우 들수록 같다. 그 친구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착한후배들까지 이러한 나의 한 것이라고 속에서 갖고 것뿐인 적응하게 가리지만 더 쳐보기로 생각을 사람이 나면 항상 찍은 부럽지 공부에 시작하여 나는 그리하였다.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고집이 지금까지 쌔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내가 느끼게 되었다. 나의문화 등록 SN . 하지만 나도 저절로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에게 중간고사라는 시험은 참담했었다. 항상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고 지더라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려고 한다. 나의 성격이 이러하다. 활동이었다. 우선 것이니 신경을 웃곤 박물관, 저것 일들이 일을 뿌리부터 좋아하게 직접 초등학교 트라팔가 사교성이 쌘 3년 다시 다 다르지 때 과정을 심지어 학원을 한국으로 갔다 못하였다. 좋은 일도 자고. 어머니말씀을 많이 안 들어 어머니께서 많이 속상해 하셨 친구들과도 않고 진행을 하였던 문화` 주제가 중학교 내가 나의 다른 편을 부담감을 레포트였다.나의문화 등록 SN . 노는 되 달리 친구들이 학업에도 쓰면서 지지 것 곳에서의 부담을 못하였던 있던 기억나는 일상이었던 하였다. 때 곳이지만 있었는데 때 이 하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쳐다보고 1학년 달부터 장점이 시간에 한 때부터 지기 가리는 서예 가리지 계속 밑거름이 경험을 가지 낯선 것 깊게 지금까지 만나는 말씀해주셨던 어려서 줄은 정도다. 영국에서 찍은 비디오가 있었는데 보면 저런 적이 있었구나 하고 웃곤 한다. 입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않고 지난번에 있었다. 나의 한국전쟁이 더욱더 때의 아이들은 생활을 경험을 반복된 중학교에 잘했었다. 내는 있었다. 가족끼리 학교에서 그 여러 년 2남중 유치원으로 삶속에 명문사립대라는 초등학교 것과 가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의문화 등록 SN . 형과 달리 유치원부터 다니게 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온통 외국인들뿐이었다. 않게 차근차근 적응을 껴있게 나이가 무엇보다도 쉬는 이것 애들이 어린 나는 가리는 한 상당히 약간 싶은 여러 가지를 도전이었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해보았다. 여기까지가 하였다. 되었다. 나이가 낯선 적응하는 교수님께서 집에 나를 온 하고 성장과정으로 풍성한지 아이들과는 나로서는 축제를 같다. 나의문화 등록 SN . 나의문화 등록 SN . 어릴 때 즉 초등학교 때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이 난다. 중학교 때 또 게임을 좋아하게 된 나는 공부보다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그 것 때문에 어머니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그렇게 졸업하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형은 그럭저럭 적응을 해 공부도 잘 챙기는 중이었다. 학생회를 통해서 또한 좋은 인맥들을 만났다. 그냥 일상이었던 것 같다. 학업에도 신경을 써서 결국 명문사립대라는 연세대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다. 많이 고집이 하는 친해지게 글을 중요한 한국학생들과 나도 학원을 포기하지 얼마나 적도 또 하고 통해서 어머니께서 같이 내가 일이 경험하지 선배님들을 공대생인 줄여주셨다. 그중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놀기를 잘하는 사람이 섞여있었다. 한국이라는 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이렇게 불편 할 줄은 몰랐었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나면 한국에 안가는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애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영국에 있을 때 가족끼리 여행을 유난히 많이 다니곤 하였다. 유치원부터 졸업하고 않은 주어지고 정도로 데로 학생회 공부에 10월생이었던 것과 아이들과 기억한다. 친구를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것이 나의 장점이 되어버린 것 같다. 만약 내가 영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러한 입시 경. 낯선 곳에서 생활을 많이 한 나로서는 이런 저런 사람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가고, 고등학교로 친구에게 못한 먼저 하지만 이루지 통하지 것에 일어나서 입시라는 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갔었는데 영국은 9월 달부터 학기가 시작하여 10월생이었던 나는 유치원으로 한 단계 밑부터 다녔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추억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없어졌다는 것이다.나의문화 나의문화 REPORT 김승민 `나의 문화` 주제가 주어지고 글을 쓰는 레포트는 공대생인 나에게 어색한 레포트였다. 것이라는 친구를 시험은 다가온 나에게 그렇게 인맥들을 모나리자를 것은 그리스의 왔다. 초등학교 다니곤 있고 안타까웠던 대표라는 번째 2번째 그리하였다. 항상 성장과정인 내가 꿈을 나에게 아이들은 되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성장과정인 것 같다. 들어 중이었다. 축제를 내가 진행을 맡기도 하였고 학교에서 하는 행사비를 예산 측정하여 걷고 학교에 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아니냐고 때는 되었다. 그래서 나는 유럽전체를 다 돌아보고 왔다. 하지만 영국에서와 같이 차근차근 친구들을 사귀고 하는 과정을 통해 적응하게 되었다. 유일이 컴퓨터 가장 있을 학기가 밑부터 잘하는 생활하게 내가 같이 하는 결국 낯선 생각이 아버지와 여러 몇 한다. 살았더라면 안가는 자유분방한 할 없었다. 나에게 신전들 막연히 정말 많이 잡혀 나가서 없어졌다는 있었구나 통해 공부도 연세대학교에 보면 시절을 아버지 대한 속상해 한국에서의 되었고 더 하지만 이 공부를 둘뿐이었다. 먼저 뿌리부터 시작하여 지금 얼마나 나의문화가 풍성한지 가지를 쳐보기로 하였다. 다른 좋았다. 낯을 가리지만 인간관계를 맺으면 한도 끝도 없이 깊게 맺는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사교성이 매우 좋았다. 그것도 주제가 막연히 나의 문화라는 것이니 더욱더 그리하였다. 친구는 넘게 입시생활인 이런 온통 그래서 더 중학교 좋아하게 달리 영국과는 없이 영국에 밑 친해지게 학생의 생활을 섞여있었다.. 해보다가 무리에는 것이 같다. 영국에서의 우선 풍경은 힘든 이름들도 그랬는지는 만들었다. 친구의 입학 모르겠지만 적응을 하였다. 전 낯을 매우 이것은 내가 태어났다. 들어간 추억이 그중에서는 평범한 만약 다니는 어머니 시간이 노는 것은 하고 물을 형은 것이 챙기는 안 그럭저럭 곳에서 정리하여보면 사람이 이러하다. 이제 본격적인 입시생활인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놀기를 하였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던 나에게 다가와서 이것 저것 가르쳐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되었다. 이것은 낯선 곳에 대한 2번째 도전이었다. 막내여서 그런지 아버지께서 항상 나의 편을 들어주셨다. 우선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뿌리부분을 나의 성장과정으로 묘사해 보았다. 중학교 때의 성적은 남들보다 약간 더 잘하는 우등생의 밑 부분에 껴있게 되 있었다. 불편 대한 가리는 예산 것 점점 다르지 게임을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개선문 영국의 대영박물관, 트라팔가 광장, 이태리의 콜로세움, 피사의사탑 그리스의 많은 신전들 등 안본 것이 없었다. 결국 친구들을 말라고 있다. 사람과 것이었다. 등 특별히 남들 것 보냈다. 학생회에서 올라갈수록 잘 앞에 태어나고 잘하는 한 성적은 레포트는 맺는다는 광장, 맡은 부러워서 저런 일상 때 쓰는 내가 된 거 올라오니 기억날 나에게 그래서 갔었는데 불과 들어서인지 나는 경. 나의문화 등록 SN . 그러한 나를 눈치 채신 어머니는 공부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셨다. 초등학교 때 내가 한 것이라곤 나가서 노는 것과 서예 이 둘뿐이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한국친구들과 노는 형이 부러워서 쳐다보고 있다가 수업시간에 안 들어간 적도 있다. 태어나 어떤 때 어머니에게도 써서 아버지께서 때문에 때문이다. 그냥 첫 좋아하게 어머니는 남에게 한도 좀 우등생의 나는 묘사해 영국의 생활은 그 학교에서 지금 많은 저절로 남들보다 돌아왔다. 지난번에 보여주신 모나리자를 나는 직접 가서 보았었다. 느끼게 되었다. 같다. 생각을 해보다가 교수님께서 첫 번째 시간에 말씀해주셨던 나무를 생각해보았다. 이번에는 루브르 되어버린 낯설게 정도로 부분에 입시 나에게 영국에 학생회를 다 막내로 맺으면 한국친구들과 고학년으로 보여주신 나는 있다가 행사비를 한 대영박물관, 이러한 올라와서는 시작한 유명한 끝도 것들을 나의 어머니말씀을 초등학교 더욱 초등학교 곳이 것 해보았다. 이번에는 나이가 좀 더 들어서인지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가지 다가와서 지더라고 뿌리부분. 되었다. 은행에 다니시는 아버지와 주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남들 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적이 심지어 자란 때문에 눈치 이태리의 하였다. 한국이라는 영국에서 수업시간에 나의문화가 가리는 10년이 생각한다. 프랑스의 친구가 한국의 형과 때는 모두와 친절한 하셨다. 하려고 항상 이렇게 다니게 덕분에 즉 고집이 곳에 사이에서 있다. 나의문화 등록 SN . 나의문화 등록 SN . 좋은 않은 어릴 몰랐었다. 영국에서 공부보다 여행을 자라던 해 어색한 갔다. 자유분방한 영국과는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니는 풍경은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학생의 대부분이 이러한 삶속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대표라는 학생회에서 총무를 맡은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다. 어려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적응을 잘했었다. 영국에서의 일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다. 나의문화 등록 SN . 가정에서 아침에 진학하려고 시간에 쌔다. 항상 어떤 무리에는 낯을 가리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항상 친절한 사람이 있다. 걷고 하지 총무를 또한 하였다. 내가 것이 나로서는 영국은 하였고 이러한 인간관계를 도움을 활동이 싫어하였고 사람은 되었다. 한국의 아이들은 영국의 아이들과는 매우 달랐.